끝나지 않은 잭팟
본문
“철봉TV를 보면서 수많은 내공과 좌절을 겪은 사람들에 비하면 내 카지노 인생은 어린아이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오늘, 25년간 아무도 몰랐던 이중 생활을 용기 내어 적어보고자 한다.”
2000년대 초, 나는 술을 좋아해 늘 내손동 2층에 있는 Yaja bar를 드나들었다. 그 사장님은 나보다 형님이셨고, 항상 친절 했으며 술잔을 부딪치며 정이 깊어졌다. 어느 날 형님이 불쑥 말했다.
“**야, 필리핀 한번 가보자.”
그 한마디가 내 25년 카지노 인생의 문을 열었다.
처음 발을 디딘 필리핀에서 나를 사로잡은 건 카지노가 아니었다. 바로 KTV였다. 낯선 무대에서 부르는 노래, 자유로운 웃음, 한국에선 느낄 수 없는 해방감. 그곳에서 나는 완전히 오라오라병에 걸려 있었다. “또 와야겠다.” 그 단순한 생각 하나가 나를 매년 4~6번씩 필리핀으로 이끌었다.
형님을 따라 들어간 파빌리온 호텔 카지노에서 처음 배운 게임은 블랙잭이었다. 남들이 말하는 초심자의 행운??????적어도 내겐 없었다. 몇 번을 가도 단 한 번도 돈을 따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카드 한 장을 뒤집는 순간의 긴장감, 칩을 올려놓는 두근거림. 그 순간순간이 내 삶을 전율하게 했다. 돈은 잃었지만, 나는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 후 25년 동안, 필리핀은 내 또 다른 삶의 무대가 되었다. 잘 풀리는 날은(결국 마지막에는 다 잃고 갔지만^^:;) 호텔방에서 맥주 한 캔에 은퇴를 꿈꿨고, 다음 날이면 전재산을 반납하고 천장만 바라보며 후회했다. “다시는 오지 않겠다” 다짐했지만, 몇 달 뒤 또 비행기표를 끊고 있었다. 겉으로는 평범한 가장이었지만, 속으로는 아무도 모르는 이중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일행들은 KTV로 향했고 나만 혼자 카지노로 내려왔다. 무심코 앉은 슬롯머신. 그리고 갑자기, 요란한 불빛과 함께 그랜드잭팟이 터졌다. 내 손에 쥐어진 건 1300만 원. 늘 빈손이던 나에게 찾아온 인생 첫 반전이었다. 그 순간의 희열과 전율은 온몸을 흔드는 충격이었다.
나는 받은 페소를 조금씩 나누어 호텔 정문 오른쪽 환전소에서 달러로 바꾸었다. 당시는 송금 방법도 몰라, 그저 달러로 바꿔 한국으로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창구 너머로 건네받은 달러는 내게 마치 금덩이 같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내 마음속에는 믿음 하나가 자리 잡았다.
“나도 인생 역전을 할 수 있다.”
그 믿음은 곧 욕망이 되어 나를 더 깊은 곳으로 끌고 갔다. 슬롯머신에서 시작된 내 도박은 결국 바카라로 옮겨갔다. 사람들이 ‘악마와 손을 잡는 게임’이라 부르는 그것. 처음엔 작은 금액으로 시작했지만, 곧 베팅 금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타이든, 페어든, 보이는 족족 베팅하는 게 일상이 되었고, 판마다 터지는 환호와 시선이 나를 더 자극했다. 나는 그 열기에 취해 무리해서 더 큰 돈을 걸었다. 돈이 녹아내리듯 사라지는데도, 정작 나는 죽어가는 줄도 몰랐다. 게임보다 무서운 건, 남들의 시선과 내 안의 욕망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은 곧 찾아왔다. 내 손에 들어온 아버지가 물려주신 2억 원. 그 돈은 가정을 지킬 버팀목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인생 역전의 불씨로 던져버렸다. 칩으로 바뀐 순간, 아버지의 2억은 불길에 삼켜진 종이처럼 빠르게 타들어갔다. 한 장, 두 장… 불꽃에 삼켜지는 듯 사라지는 돈의 잔해를 바라보면서도 나는 끝내 손을 거두지 못했다. 채 1년도 되지 않아, 아버지의 2억은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
그러고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와 집을 담보로 대출을 최대로 당겨 2억 7천을 마련했다. 스스로에게는 다짐했다. “이번에 본전만 찾으면 바로 접자.” 그러나 그 다짐은 채 19일 만에 물거품이 되었다. 내 전재산이, 내 가족의 삶이, 내 자존심이 그 짧은 시간 안에 흔적도 없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나는 도박판에서 잃은 사람이 아니라, 국제 수출 사기를 당한 피해자인 양 가족들에게 거짓말을 꾸며냈다. “사업 때문에 당했다”고 둘러댔고, 그래도 신고는 하자며 끝까지 주장하는 아내를 나는 오히려 뜯어말리는 데 힘을 쏟았다. 그 순간 나는 돈만 잃은 게 아니었다. 가족의 신뢰와 내 양심마저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 이후로 한동안 필리핀을 가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갈 돈이 없었다. 한때는 일상이었던 마닐라행 비행기표조차, 이제는 감히 손댈 수 없는 사치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머릿속은 또다시 돈 생각뿐이었다. “어디서 마련할까… 어떻게든 다시 해볼 수는 없을까.” 결국 나는 퇴직금 중간 정산을 받기로 했다. 손에 쥔 3천만 원. 그 돈을 받아든 순간, 나는 또다시 앞뒤 가리지 않고 필리핀으로 향했다. “이번만큼은 꼭 이기겠다.” 스스로를 다잡으며 다짐했다.
이번에는 무작정 달려들지 않겠다고, 하루하루 루틴을 짜고 계획을 세워 도전했다. 그러나 결론은 뻔했다. 의지가 박약한 나에게는 그조차 너무나 어려운 싸움이었다. 계획은 금세 무너지고, 나는 또다시 열기에 휩쓸려 칩을 던지고 있었다. 의지는 사라지고, 남은 건 후회뿐이었다.
돌아갈 자신도 없었고, 더 이상 돈이 나올 곳도 없었다. 친구나 지인에게 몇 백, 몇 십을 빌리며 구차하게 사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죽기로 마음을 먹었다. 감기약 3일치를 한꺼번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수면 성분이 있으니 깨어나지 못할 거라 믿었다. 모든 게 끝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호텔 의무실에서 파견된 직원들과 몇 사람이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 소리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스스로 부끄러움에 휩싸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느낀 건 오직 하나였다. 돈도, 희망도, 목숨조차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처절한 무력감이었다.
귀국 날짜까지는 아직도 며칠이 남아 있었지만, 내게는 돈도, 그리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필리핀 항공 사무실로 찾아가 추가 요금을 지불하고 귀국편을 앞당겨 잡았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느 때보다 후유증은 더 컸다. 텅 빈 마음, 무너진 몸,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들에게 마주할 면목조차 없었다.
그 무렵 나는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무언가라도 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보험금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한 번 죽으려고 했던 마음은 예전처럼 강하지 못했다. 게다가 스스로 합리화할 이유도 찾아냈다. “자살은 가입 후 2년이 지나야 보험금이 나온다.” 그 규정 하나를 핑계로 삼으며,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무력하게, 내 삶의 잔해 위에 주저앉아 있을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25년간의 카지노는 내게 화려한 불빛보다 쓰디쓴 교훈을 남겼다. 돈은 불처럼 타올라 결국 재로 남는다. 도박은 가족의 신뢰와 내 자존심, 심지어 내 목숨까지도 앗아갈 뻔했다. 진짜 잭팟은 본전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용기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철봉TV를 보며 나는 다시금 깨닫는다. 수많은 내공과 좌절을 겪은 사람들에 비하면 내 이야기는 보잘것없다. 그러나 25년간 이어온 이중 생활은 내 인생의 가장 큰 드라마였다.
누가 내게 묻는다. “카지노에서 가장 큰 행운이 뭐였냐?”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1300만 원? 아니다. 진짜 행운은… 아버지의 2억도, 담보 대출 2억7천도, 퇴직금 3천만 원도, 목숨마저 포기하려 했던 그 순간도 모두 지나갔지만 결국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내 이야기를 고백할 수 있다는 거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토록 수많은 일을 겪고도 나는 아직도 필리핀을 다니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말한다. “예전처럼은 아니라고, 이제는 단순히 취미 삼아 가는 것뿐이라고, 중독은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말이 사실은 모두 내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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