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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사연] 제2부 잿빛 도시의 유령: 소멸의 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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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의 겨울은 칼바람보다 무거운 침묵으로 찾아왔습니다. 

2억 5천만 원이라는 숫자가 '0'으로 수렴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90일. 

통장 잔고가 바닥나던 날, 

제 세계는 화려한 엑셀 시트가 아니라 강원랜드 4층 로비의 낡은 가죽 소파로 축소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더 이상 냉철한 분석가가 아니었습니다. 

며칠째 감지 못한 머리카락에선 담배 찌든 내와 편의점 컵라면 수프 냄새가 뒤섞여 났고, 제 눈동자는 승률을 계산하는 대신 누군가 마시다 버린 음료수 캔에 남은 당분을 쫓았습니다. 

무료 음료 바에서 가져온 설탕 커피 석 잔으로 하루를 버티며, 저는 소파에 몸을 구긴 채 생각했습니다.


"확률은 공정하다. 하지만 굶주림은 지독하게 불공정하다."

 

인간이 이토록 추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는 통계학적 지식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단지 사흘의 굶주림과 영하 15도의 기온이면 충분했으니까요.


 '휴대폰 내구제'

정신이 가물거릴 무렵, 낡은 등산복을 입은 청년 하나가 제 시야를 가로막았습니다. 

"자금 필요하신 거 없으세요?"

담보도, 신용도 없다고 갈라진 목소리로 답하는 저를 보며 그는 비릿하게 웃었습니다. 

그가 저를 데려간 곳은 카지노 근처의 허름한 민박집. 

그곳에서 저는 제 마지막 남은 '사회적 가치'를 팔기로 했습니다. 

이른바 '휴대폰 내구제'였습니다. 

제 명의로 최신 스마트폰 세 대를 개통하고 기기를 업자에게 넘기는 대가로 현금 100만 원을 쥐는 거래였죠.


데이터 분석가 출신의 뇌가 즉각적으로 이 미친 수식을 계산해냈습니다.

이건 이율이 수백 퍼센트에 달하는 경제적 자살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주머니의 텅 빈 감각은 이성을 마비시켰습니다. 

저는 떨리는 손으로 서류에 사인을 했습니다. 

손에 쥐어진 빳빳한 만 원권 다발.

 저는 그 돈을 들고 다시 카지노로 뛰어 올라갔습니다.

결과는 단 10분. 블랙잭 테이블의 딜러가 무심히 카드를 넘길 때마다 제 '마지막 구원'은 플라스틱 칩이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습니다. 

다시 로비 소파로 돌아왔을 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기계를 소모하고 버려진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을요.


"너, 이쪽 일 한번 해볼래?"

제 바닥을 지켜보던 업자 '만식'이 제안했습니다. 

하는 일은 단순했습니다. 

저처럼 돈을 잃고 눈이 뒤집힌 이들에게 접근해 휴대폰 개통이나 차량 담보 대출을 안내하는 '삐끼' 역할이었죠.

처음엔 거부감이 들었지만, 곧 제 안의 비틀린 재능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분석가였습니다. 

누가 지금 가장 절박한지, 누가 조금만 건드리면 영혼까지 팔 기세인지 저는 본능적으로 '데이터화'했습니다.


  • 분노 상태(Loss Aversion): 대출 권유 시 수용 확률 85%

  • 망연자실 상태: 대출 권유 시 수용 확률 40% (설득에 긴 시간이 소요됨)

  • 가족에게 전화하는 상태: 회생 가능성 있음, 버려야 할 데이터


"사장님, 지금 50만 원만 있으면 아까 잃은 거 다 복구하시잖아요. 제가 단가 잘 쳐드릴게."


제 목소리는 정중했고 눈빛은 신뢰를 주는 법을 알았습니다

저는 더 이상 도박꾼이 아니었습니다. 

도박꾼의 절망을 먹고사는 '사북의 기생충'이었습니다. 

하루에 수백만 원의 수수료를 벌어들이며, 저는 다시 렌터카를 빌려 밤거리를 누비는 '나라시(불법 택시)' 기사로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새벽, 돈을 크게 딴 손님 하나를 서울까지 모셔다드렸습니다. 

손님은 거만하게 웃으며 팁이라며 10만 원권 칩 하나를 건넸습니다. 

하지만 사북으로 돌아오는 길에 확인한 그 칩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였습니다.


"하... 하하하!"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핸들에 머리를 박았습니다. 

타인의 절망을 설계해 돈을 벌고, 다시 그 돈을 누군가의 거짓말에 속아 잃는 삶. 

사북이라는 거대한 세탁기 속에서 '도준'이라는 인간의 영혼은 이미 갈가리 찢겨 나가고 있었습니다.


백미러를 통해 비친 제 얼굴을 보았습니다. 

냉철했던 데이터 분석가는 온데간데없고, 욕망의 찌꺼기만 남은 괴물이 저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지만, 저는 다시 시동을 걸었습니다. 

다음 손님을 찾아, 다시 그 잿빛 도시로 돌아가야만 했으니까요. 

그것이 제가 선택한 소멸의 서곡이었습니다.


도박은 단순히 돈을 잃는 게임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가치를 가진 사람이었는지를 잊게 만드는 무서운 늪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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