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 소설 - 마지막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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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가을
푸른 밤의 끝자락
병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야경이 유독 선명했다. 온통 하얀색으로 채워진 병실에서 유일하게 색을 입힌 아이보리 커튼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불빛들이 마치 깊은 바닷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시연(詩宴)의 바닷속처럼 고요하고 깊은 푸른빛이 창 너머로 쏟아졌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왜 사람들이 이런 밤을 두고 '푸른 밤'이라 부르는지. 내가 살던 그곳의 색깔, 켜켜이 쌓여있는 삶의 무게들이 이렇게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조금 전까지도 고통과 사투를 벌이다 진통제를 맞고서야 겨우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이곳에 들어온 지 며칠이 지났는지, 앞으로 얼마나 더 버텨야 할지 알 수 없는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이것만은 분명했다. 아버지는 결코 살아서 저 창밖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보호자 분, 서류 작성 부탁드립니다."
간호사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심폐소생술 포기 동의서. 그 차가운 종이 한 장이 내 손에 들려있었다. 이보다 더 가혹할 수 있을까. 아버지란 사람은 끝까지 이렇게 내 삶을 휘두르려 드는 걸까.
균열의 시작
그날의 전화는 여느 때와 달리 크게 들렸다. 내 폰에 저장되지 않은 번호. 하지만 누구의 것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신이 아닌 이상 지울 수 없는, 그래서 기억 저편으로 밀어 넣으려 했으나 끝내 사라지지 않았던 그 번호.
"아빠다. 나 지금 병원에 와 있어. 몸이 좀 안 좋아서..."
문자를 읽다 말고 지워버렸다. 누가, 내가 누구의 보호자란 말인가. 이제 와서 자신의 보호자가 되어달라니, 어떻게 그리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건지.
내 기억 속의 균열은 일곱 살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미국과 일본을 전전하다 귀국한 아버지가 나를 데려간 그때부터다. 이미 친모와 이혼한 터라, 나는 낯선 아버지의 울타리로 들어가야 했다. 친어머니는 미국인과 재혼하면서 나를 '자연스럽게' 떠넘겼다. 그렇게 나는 이름만 아버지인 사람과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했다.
쓰라린 성장
새어머니의 불같은 성격은 예민한 사춘기 소년의 가슴에 날마다 비수를 꽂았다. 그녀의 음식 솜씨 덕에 시작된 작은 식당은 우리의 일터가 되었다. 학교 공부와 집안일, 식당일, 배달까지. 어린 나이에 감내해야 했던 수많은 일들은 나를 너무 일찍 철들게 만들었다.
다행히 식당은 잘 되었다. 가정 형편도 나아졌고, 아파트도 장만했으며, 식당 규모도 커져갔다. 그때가 우리 집안의 전성기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낮에는 직장에서, 저녁에는 식당에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였을까. 주말마다 식당 문을 닫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좋았다. 쉴 수 있어서. 부모님이 외출하는 날이면 나에게도 관대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향한 곳은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백운산 자락에 자리 잡은 강원랜드였다.
도박의 심연
카지노의 세계는 처음엔 단순한 오락이었다. 주말마다 가는 여행 정도로만 보였다. 하지만 점차 그곳은 깊은 심연이 되어갔다.
슬롯머신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소리, 바카라 테이블 위에서 카드를 뒤집는 순간의 전률, 룰렛 휠이 돌아가는 소리. 이런 것들이 아버지의 일상이 되어갔다.
"바카라는 가장 스릴 넘치는 게임이야. 테이블에서 카드를 천천히 들추는 묘미는 스카이다이버가 수천 미터 상공에서 점프하는 것보다 더 큰 스릴을 준다고."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그의 눈은 이미 현실을 보지 못했다. 오직 카드와 칩만이 그의 시야를 채웠다.
무너진 일상
식당 형편이 어렵다며 돈을 빌려달라는 전화가 잦아졌다. 심지어 장모님 명의의 집을 담보로 대출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선한 장모님은 사위인 나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대출까지 받아주셨다.
우리는 몰랐다. 그 돈이 모두 도박 자금이 될 거라는 것을. 소위 '공지'라 불리는 카지노의 사기꾼들에게 모든 재산을 털린 채,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무일푼이 되어버렸다.
책임지고 갚겠다던 대출금은 연체되었고, 법원에서 집 경매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그제야 모든 것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강원랜드를 찾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이란 돈은 죄다 긁어모았다.
끊어진 인연
나는 아흔이 넘은 할아버지께서 과수원을 관리하며 버는 돈마저 노리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치가 떨렸다.
"사람이 만든 게임인데 돈을 따는 방법도 분명히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할아버지의 눈물겨운 노동의 대가마저 탐내는 모습에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는 버릴 수 있어도 강원랜드는 버릴 수 없다."
그 말을 들은 후, 나는 결심했다. 강원랜드에 발을 끊기 전에는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찾아오지도 말라고 선언했다. 그렇게 수년의 시간이 흘렀다.
병실의 시간
방광암 진단이 내려졌다.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시작하자는 의사의 권유에도 아버지는 거부했다. 그리고 여전히 카지노를 찾았다. 바카라와 블랙잭, 룰렛, 빅휠, 다이사이에 대한 배팅 시스템을 연구한 노트들을 들고서.
이제는 병상에 누워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어떤 룰렛을 돌리는지, 어떤 바카라를 하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 되었다. 의식은 점점 흐려지고, 통증은 마약성 진통제로도 잠재우기 힘들어졌다.
기저귀를 갈아주며 무심코 던진 말.
"아빠, 나 어렸을 때 내 기저귀 갈아준 적 있어?"
"있어... 있다고..."
힘겹게 대답하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마음 한켠이 아려왔다.
마지막 단풍
이른 다섯의 여름을 병실에서 보내고 있는 아버지는 이제 가을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의 가을이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단풍이 들기도 전에 떠나가려 하는 아버지를 보며 후회가 밀려온다. 도박 중독을 병으로 인식하고 치료를 권하지 못한 것. 냉정한 비난 대신 따뜻한 손길을 내밀지 못한 것.
창밖으로 스러져가는 햇살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단풍처럼 화려하게 타오르다 스러져간 아버지의 인생을. 그리고 그를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던 나의 모습을.
아버지는 단풍이 지기도 전에 떠나가려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도박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채로. 하지만 이제야 나는 이해한다. 그도 어쩌면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과 죽음을 건 마지막 도박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렇게 우리의 이야기는 깊어가는 가을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마치 단풍잎이 바람에 흩어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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