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참여) P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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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차여행을 좋아한다. 난생 처음 가본 강원랜드도 기차를 타고 갔었다. 아파트 화단에 라일락꽃이 만발한 어느 오월이었을 것이다. 제천역까지 기차로 가서 거기서 다시 태백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민둥산역까지 오면서 그때까지 우리나라 고산고지대에 이렇게 철길이 놓여 있었는지도 몰랐다. 몇 개인지도 모를 많은 터널과 좌우를 살펴봐도 철쭉과 같이 때늦은 봄꽃에 덮인 산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북역에 다다르기도 전에 여기가 한때 석탄산업으로 우리 경제를 이끌었던 곳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강원랜드 카지노에 들어섰다. 참 넓고 별천지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의 심장은 분명히 평정심을 한참 벗어나 있었으며 비록 사람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산업의 한 현장이겠지만 나도 여기에 일조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안내데스크에 꽂혀있는 게임안내책자를 펼쳐봤지만 그걸 익혀서 게임테이블에 앉을 시간도 자신도 없었다. 기차예약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사람 구경을 했다. 벌건 대낮에 이렇게 일도 안 하고 게임만 해서 우리나라가 망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 것도 사실이다. 빅휠 앞에 섰다. 사람들이 베팅을 하고 단정하고 말끔한 유니폼이 잘 어울리는 딜러가 "No more bet"과 함께 커다란 풍차를 힘껏 돌린다. "따따따따따.." 가죽띠가 구분선을 지나 멈추면 가벼운 탄식과 박수가 교차한다. '이건 할 수 있겠다.' 자리가 꽉 차 뒤에서 베팅을 했다. 골드와 실버가 운 좋게 몇 번 맞아 기차 삯이며 식대 빼고도 십여 만 원을 더 벌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와 사북역으로 향했다.
내가 강원랜드에서 P를 본 것은 그로부터 2년 반쯤이 지났을 무렵이다. 우리나라에서 단풍이 가장 어울리는 곳이 있다면 아마도 산마루에 태백선이 놓인 정선일 것이다. 열차 창밖으로 가을 햇살이 저 산 아래 호수 위에 눈이 시리도록 일렁이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빅휠 게임으로 여행 경비는 벌었고 어느 정도 기차시간이 남아 계단 밑 소파 위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2층 객장이 보고 싶어서 더벅더벅 걸어 올라갔다. 2층 계단에서 가장 가까운 다이사이 게임 구경을 하다가 안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바카라 테이블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저만치에서 낯이 익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P였다. 여기서 그를 보다니.. 반갑기도 하고 인사를 해야 되나 순간 망설여졌다. '역시 게임을 좋아하는구나.' 그날도 아주 짧은 머리에 검은 피부에 어울리지 않게 검은 자킷을 입고 있었다. 잠을 못 잔 듯, 초췌한 모습에서 아마도 많은 시간을 게임에 몰두한 것 같았다. 베팅하는 사이, 칩 앞에 두 손을 괴고 눈을 감은 모습이 들어왔다. 뒤에서 어느 중년여성이 베팅을 부탁하며 칩을 건네자 이내 못 이겨 눈을 다시 떴다. 이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다니 의외였다. 인사를 건네고도 싶었지만 피곤해하는 모습을 보니 그냥 지나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방향을 바꿔 음료수를 무료로 제공하는 곳에 가서 망고주스 한 잔을 마셨다. 그곳에 빼곡히 쌓인 종이컵을 보니, 오늘도 대박의 꿈을 좇아 많은 사람들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여유 있게 나가자 마음먹고 블랙잭 테이블을 구경하며 천천히 걸어 계단을 향하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돌아보니 P가 서 있었다. "많이 땄어요? 여기서 보게 되네요. 하하하." 그 특유의 사람 좋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뭐 조금.. 차비만 땄네요." 인사를 먼저 못한 것이 조금은 미안했다. 아마도 화장실에 들러 볼일을 보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나오면서 나를 알아본 듯했다. "많이 따셨어요? 여기는 자주 오세요?" 내가 묻자, "천 몇백 잃다가 조금 복구하고 한 600정도 잃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이 사람도 사업을 한다더니 게임도 크게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O부장하고 다시 봐야죠." O부장은 내 고향친구이다. 악수를 하고 본전 근처에 오면 타고 온 자가용으로 집으로 돌아갈 거라며 다시 게임테이블로 향했다. 나도 카지노를 나와 사북역으로 향했다.
강원랜드에서 P를 만나기 몇 해 전, 고향친구들의 계모임에서 금산의 한 민박집으로 1박2일 놀러 간 일이 있었다. 중견건설회사에 다니는 O부장도 같이 말이다. 초저녁에 삼겹살파티와 술판이 벌어졌고 10시쯤 되자 언제나처럼 포커게임(7오디)이 시작됐다. 그러고 나서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화장실에 다녀오던 O부장이 들어오며 "내 옛날 직장 알지? 부도난 데 말이야. 거기 사우회를 지금껏 하는데 거기 친구 하나가 게임하러 오겠다는데 괜찮지?"라는 것이 아닌가. 고향동네 자칭 타짜라는 K와 S가 마다할 리 없었다. K가 말했다. "야. 이 시간에 대전에서 택시 타고 여기까지 올 정도면 그 사람도 노름을 어지간히 좋아하는구먼. 껄껄껄." 얼마 후 도착한 사람이 바로 P였다. 그때도 막 군대에 입대한 장정처럼 짧은 머리에 테 없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었다. 직업이 그래서인지 검은 피부에 다부진 체격이었다. 세상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흔하고도 법 없이도 살 만한 선한 인상이었다. 친구인 O부장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 같은 건설회사의 현장직에 있다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나와서 지금은 건설하청업체를 차려서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묘하게 처음부터 이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선한 인상 때문이었으리라. 게임 중에 P가 내 친구 K나 S, 심지어는 L에게 계속해서 판을 내줄 때도 속으로 P를 응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새벽 4시쯤 게임이 끝났다. 역시나 P가 올인을 당했다. 나는 술을 못하기에 P와 다른 내 친구들과 다시 술잔을 기울이는 것을 뒤로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P는 없었다. 술자리가 끝나자 택시를 불러서 대전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 후로 동네친구들은 그를 '호구'로 불렀고 O부장도 웃어넘겼지만 나는 그것이 굉장히 못마땅했다. 그것이 P와의 첫 만남이었다.
O부장이 얘기한 그 사우회는 6~7명 정도로 계속 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한두 명 빼고 같은 나이에 사회초년생들로 모인 첫 직장이 도산을 해버렸으니, 서로에 대한 연민과 동지애 같은 것들로 똘똘 뭉치게 되었던 것 같다. 정기적인 모임은 아니었지만 설이나 추석 명절과 휴가철 그리고 생일상 차리기를 좋아하는 친구들과의 생일파티를 종종 하는 듯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뒤풀이는 포커게임이 있었고 O부장은 나를 꼭 초대해 주었다. 그 사우회의 회원 하나가 알고 보니 내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나는 술을 못하니 게임이 끝나면 늦은 새벽시간이라도 군소리 없이 대리운전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게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긴 했지만 어쩌다가 돈을 잃을 때면 가장 걱정해 주는 사람이 바로 P였다. 그날 돈을 많이 딴 사람이 있으면 대리운전비 줘야 한다며 돈을 뜯어서(?) 나를 챙겨주곤 했다. 강원랜드에서 P를 보고 난 이후 다시 그를 만난 곳은 역시나 그 사우회원 하나가 운영하는 조그만 사무실이었다. 회식 후에 게임이 벌어졌고 어김없이 나를 부른 것이다. 게임 중에 내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회원 하나가 대뜸 "야. 너 강원랜드 카지노에서 이 자식 봤다면서? 이 놈 그날 무지 잃었다는데 얘 좀 데리고 오지 너 혼자 그냥 왔냐?"라며 나를 핀잔하는 것이었다. 가장 놀란 사람은 내 고향친구 O부장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P의 프라이버시를 생각해서 그곳에서 P를 만났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었다. "나는 그냥 기차여행 경비나 벌어 볼 요량으로 카지노에 간 건데.. 그리고 욕심만 안 부리면 잃지는 않겠더구먼." 사실이 그랬다. 물론 운이었겠지만. P는 쑥스러웠는지 "욕심만 없으면 돈을 딸 수 있다는데 나는 그게 어렵네."라며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그때 친구의 핀잔에 얼떨결에 내뱉은 그 '욕심'이란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과연 욕심 없이 카지노에 가서 돈을 잃지 않았을까? P는 그날 욕심을 부려서 그 많은 돈을 잃었던 것일까? 돈을 잃지 않을 용기가 부족해서 돈을 잃은 것은 아닐지 아직도 나는 해답을 찾지 못했다. O부장과의 개인적인 만남에서나 고향친구 계모임에 나가면 나는 P의 근황을 묻곤 했다. 그때마다 O부장은 "사업은 그럭저럭 되는 모양인데 카지노에 너무 빠져서.."라며 말끝을 흐리곤 했다. 그리고 그 후로 사우회 모임은 종종 있었지만 달라진 점은 P가 자주 그 모임에 불참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P의 불참 사유를 물었지만 일이 바빠서겠지 뭐 하며 불편한 시선으로 서로 쳐다보는 그들을 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근 1년 만에 P를 다시 본 것은 A대학 앞 도로건설 현장 사무실에서였다. 사우회원 중 하나가 그곳 현장소장이었고 밤에 게임이 있으니 나를 부른 것이다. P를 보니 반가웠다. 게임 중 우연히 화장실에서 그를 보았는데 내가 "요즘도 강원랜드에 자주 가세요?"라고 묻자, "거기는 다 좋은데 출입제한이 걸려서요. 마카오나 어디 동남아로 가든지 해야지 원."라는 것이었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후로 나는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 P를 다시 볼 수 없었다. 중간에 O부장이나 그 사우회의 내 동창에게서 들은 소식으론 카지노에서 잃은 돈도 많지만 결정적으로 동네의 성인오락실에서 엄청난 돈을 잃고 부인과도 헤어지고 사업체도 잃고 서산 어디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전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술에 거나하게 취한 O부장 아니, 그 즈음 임원으로 승진한 O상무를 차에 태워 집에 데려다 주는데 차 안에서 그런 얘기를 내게 해 주었다. "너 예전에 강원랜드에서 P를 봤다고 했지? P가 언젠가 술자리에서 나한테 그러더라. 그때 너를 자기 차에 태워서 집에 같이 오지 못하고 기차역으로 보낸 것이 후회스럽고 너한테 미안했다고.." 그 말을 듣고 마음속에 무언가 맺혀서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내가 먼저 보고도 인사 못한 것이 나는 미안했는데..'
신이 인간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형벌은 처음 간 카지노에서 돈을 따게 하는 것이란 말이 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카지노를 올인시키려는 민족이 우리민족이란 우스갯소리도 있고, 서구사람들은 카지노는 돈을 쓰려고 가는 곳으로 알고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카지노는 돈을 벌려고 가는 곳으로 잘못 알고 있다는 말도 있다. 나는 왜 그 순박했던 사람이 도박에 빠져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전재산을 탕진하고 가족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 그 P란 사람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나에게 한때 선의를 가지고 친절을 베풀어 준 그 사람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인간의 위대함은 넘어지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데 있다고 했다. 그가 다시 일어나서 건강한 사회인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나는 20여 년 이어져 온 P와의 인연이 여기가 끝이 아니길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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