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 소설 - 도박의 늪을 건너며
본문
도박의 늪을 건너며
제1부: 가난과 성공의 사이
1장. 전쟁의 그림자
6.25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60년대 후반, 나는 경북 상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베이비붐 시대의 한복판, 전쟁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려는 대한민국의 몸부림이 한창이던 때였다.
세 살 되던 해,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했다. 속옷 원단을 짜는 기계 기술자였던 아버지를 따라서였다. 당시 우리 집은 여느 가정과 마찬가지로 넉넉지 못했다. 아버지는 매일 밤 술 한 잔을 걸치고 돌아와 어린 내게 인생 철학을 설교하듯 들려주셨다.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말이다..."
그때는 그 지겨운 잔소리가 귀찮기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유산의 전달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나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 살 아래 여동생을 낳다가 생모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 그리고 지금의 어머니는 의붓어머니라는 사실이. 그 진실은 어린 내 마음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2장. 가난을 끊어내려는 몸부림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나는 단단한 결심을 했다.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온 가난의 대물림을 내 세대에서 끝내겠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공부밖에 없었다.
3년 내내 독서실을 집보다 더 많이 드나들었다. 방학이면 하루 15시간씩 책상에 앉았다. 장군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육군사관학교 특차 시험에 도전했고,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시력 때문에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잠시 방황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 책상 앞에 앉았고, 결국 상위권 대학에 합격했다. 가난한 집안의 자식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3장. 격동의 시대를 건너며
대학 시절은 혼란스러웠다. 12.6 사태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 격변의 소용돌이가 캠퍼스를 휩쓸었다. 군대를 다녀온 후 고시 공부에 도전해보았지만, 경제적 형편이 따라주지 않았다.
결국 무역회사에 취직했다. 은행, 세관, 영업 등 다양한 업무를 경험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내려가 1년간 준비한 끝에 7급 국가공무원 시험에 지원했다.
평균 점수 100점으로 수석 합격.
공부만큼은 자신 있었다.
당시에도 공무원은 꽤 인기 있는 직종이었다. 업무도 적성에 잘 맞았고, 몇 년간은 자부심을 갖고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그즈음, 항공사에서 근무하던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4장. 평화로운 나날의 끝
뜨거운 연애 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아이를 갖는 것도 미루며 둘이서 열심히 맞벌이를 했다. 내 집 마련의 꿈을 키워가던 그 시절이, 지금 돌이켜보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평화로운 일상은 예기치 않은 방문으로 깨졌다.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직장으로 찾아온 것이다. 울고 있는 아이를 안고 온 그는 처절한 표정으로 도움을 청했다.
"남북 교류가 한창이잖아. 동화은행 주식만 받아서 되팔면 돈이 될 텐데... 급전이 필요해."
순진했던 나는 오랜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100만 원을 빌려준 그 돈은 영영 받지 못했고, 빠듯한 공무원 월급으로 갚아나가야 했다.
5장. 도박의 달콤한 유혹
우연히 들른 동인천역 근처의 성인 오락실. 그곳에서 처음 본 슬롯머신이 내 운명을 바꿔놓았다. 장난삼아 돌린 기계에서 가운데 별 네 개가 맞아떨어져 30만 원을 땄다.
"이거 괜찮은데..."
당시 만 원에 발을 떨며 살던 나에게는 큰돈이었다. 친구에게 빌려준 돈도 이런 식으로 만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였다. 틈만 나면 오락실을 찾아다녔다. 잃고 따기를 반복하면서 재미를 붙였고, 점점 도박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한때는 만 원짜리 한 장 갖고 있기 바빴던 지갑에 이제는 늘 수십만 원이 들어있어야 마음이 편해졌다.
6장. 무너지는 일상
신혼 초에 아내와 함께 세웠던 인생 계획들이 하나둘 물거품이 되어갔다. 게임을 할수록 돈을 잃었고, 잃을수록 더 많은 돈을 걸었다.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었다.
급기야 손실을 메우고 게임을 계속하기 위해 대출을 받기 시작했다. 아내에게는 늦은 귀가에 대해 끝없는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짜증을 내고 거친 말을 하며 그녀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신용카드를 10개나 발급받아 돌려막기를 했다. 공무원으로서 절대 받아서는 안 될 돈과 청탁을 받기도 했다. 한때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롭게 흘러가던 내 인생이 이렇게 망가지는 데는 1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7장. 도주
결국 공무원 월급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채무를 견디지 못했다. 우편으로 사표를 제출하고 어느 날 홍콩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죽음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내에게는 "잠시 바람 쐬러 간다"는 편지만 남겼다. 돌아올 생각은 없었다. 동남아와 중국을 정처 없이 떠돌았지만, 죽을 장소도, 죽을 용기도 찾지 못했다.
한 달 후, 중국 텐진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여객선에 올랐다. 검푸른 밤바다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냥 죽자... 죽어버리자... 살아서 뭐하나, 이미 망쳐버린 인생..."
수없이 갑판에서 몸을 던지려 했지만, 어떤 미련이었을까. 끝내 실천하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배는 인천항에 도착했다.
8장. 파멸의 끝에서
한때는 찬란했던 내 미래였다. 공채 수석 합격, 내부 승진 기대 서열 1위, 각종 연수 훈련 성적 항상 1등, 우수한 외국어 실력... 거기에 준수한 외모의 어여쁘고 정숙한 아내까지. 시간만 가면 조직의 수장 자리도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을.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귀국 후 아내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백했다. 서로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지금도 그때 아내의 눈물 흐르던 얼굴이 선명하다. 그런데도 그 착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우리 이제 모든 걸 다시 시작해요. 처음부터 새 출발하면 되잖아요. 당신은 능력 있는 사람이에요. 난 당신을 믿어요."
9장. 끝나지 않은 유혹
살던 집 전세금으로 은행 빚과 카드빚을 청산했다. 아내의 권유로 교회에도 나가고 왕십리 단도박 모임에도 참석했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듯했다. 하지만 몸 속에 흐르는 도박의 피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출국할 때 제출한 사표가 제대로 수리되지 않아 파면 처분을 받았다. 소청심사위원회에 소청을 제기했으나 기각되어 퇴직금도 절반밖에 받지 못했다. 그마저도 빚을 갚느라 바닥났다.
설상가상으로 아내가 임신을 하게 되어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영월에 계시던 아버님은 담도암 판정을 받아 수술대에 올랐다. 재수술까지 해야 했고, 결과가 좋지 않아 서울 우리 집 근처로 모셔와 간호해야 했다.
10장. 막막한 현실
30대 후반, 한때는 무엇이든 잘할 것 같고 어떻게든 잘될 것 같던 그 자신감이 서서히 무너져갔다. 퇴직 후 중국에서 물건을 수입해 팔아보겠다며 친구와 무역회사도 차려봤지만, 장사나 영업에는 소질이 없었다. 자본도, 경험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틈만 나면 성인오락실을 찾아 아드레날린을 분비했다. 사업이 잘될 리 없었다.
그날도 오락실에서 몇 시간을 보내고 상태가 안 좋아진 아버님을 찾아뵈러 갔다. 집 안에서 어머님과 여동생의 통곡 소리가 들렸다. 아버님은 내가 도박에 빠져 헤매는 동안 고통 속에서 임종하셨다. 그렇게 나는 천추의 한을 남기고 말았다.
11장. 중국에서의 두 번째 기회
사람의 인생에는 몇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고 했던가. 공무원 시절 함께 일했던 동료가 새로운 기회를 가져왔다. 대기업 협력업체로 컴퓨터 부품을 생산하는 회사의 중국 현지법인 설립 건이었다.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는다고 했다.
심심풀이로 배웠던 중국어가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몇 개월의 준비 끝에 회장님의 전권을 위임받아 중국 심양시 외곽의 한 시골 마을로 향했다. 옛 고구려 땅이었던 그 황량한 대륙의 벌판에서, 나는 또 한 번의 인생을 불사르기로 했다.
막 태어난 딸아이와 아내는 대구 처가에 머물렀다. 나는 가족 걱정 없이 회사 설립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연말연시, 주말, 설날도 반납하며 일했다. 이것이 절벽에 매달린 나를 구해줄 유일한 생명줄이라 생각했다.
그 결과 최단기간 현지법인 설립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6개월 만에 직공 400여 명 규모의 공장 가동에 들어갔다. 하지만 현지법인의 책임자가 되리라는 것은 나의 순진한 착각이었다.
12장. 또 다른 좌절
본격적인 가동이 시작된 지 몇 개월 후, 본국에서 새로운 인물이 날아왔다. 회사와 영업상 이해관계가 있던 예비역 장성이 현지법인 총경리로 임명된 것이다.
나와 그 군 출신 총경리는 매일같이 갈등했다. 회장님께 직접 고충을 호소했지만, 때마침 해결하지 못한 부채로 인해 급여가 가압류되면서 나는 불리한 처지에 놓였다. 결국 본사로 발령이 났고, 나는 다시 사표를 던졌다.
2년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때가 내 인생에서 도박을 잊고 살았던 유일한 시간이었다.
13장. 마지막 도전
귀국 후 처절한 자문이 시작되었다. 왜 내 인생은 이렇게 발전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늘 맨땅에 헤딩해야 하는 걸까.
영어를 조금 할 줄 안다는 생각에 입시학원 영어 강사 자리를 구했다. 도박 빚으로 신용불량자가 된 나는 채권자들의 추적을 피해 실체 없는 그림자 인생을 살아야 했다.
1년 정도 경력을 쌓은 뒤, 함께 일하던 수학 선생과 의기투합해 서울 근교에 입시학원을 차렸다. 여기서 대박이 났다. 내 명의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모든 것은 동업자 명의였다. 나는 언제든 문제가 생기면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그림자 신세였다.
14장. 부와 몰락의 쳇바퀴
학원은 대성공을 거뒀다. 처음에는 몇 명뿐이던 학생이 금세 수십 명으로 늘어났다. 교실이 모자라 밤을 새워가며 칸막이 공사를 했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수업을 이어갔다. 1년도 안 되어 확장 이전을 했고, 몇 년 뒤에는 2차 확장까지 했다.
전성기때는 강사 20명, 학생 500여 명의 대형 학원으로 성장했다. 우리 가족의 집도 커졌다. 단칸방에서 24평으로, 다시 35평으로. 한 달 수입이 동업자와 나눠도 몇천만 원을 훌쩍 넘었다.
처음 몇 년간은 도박이나 게임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열심히 살았고, 그런 것 안 해도 풍족했다. 사랑하는 딸은 중학교에 다니고, 아내는 딸을 보살피며 살림만 하는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15장. 마귀의 귀환
7~8년간의 호시절을 누리다가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그 도박 마귀가 또다시 내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이제는 수업도 강사들에게 맡기고 여유가 생기니 한눈을 팔게 되었다.
동네 유지들과 자주 어울리다 우연히 포커판에 끼게 되었다. 당시까지 고스톱밖에 몰랐던 내가 포커에 매료되었다. 처음에는 관전만 했지만, 배우기 시작하면서 급속도로 빠져들었다.
10여 년 전 서해를 건너오며 밤바다를 바라보며 오열하던 그 아픔, 착하디착한 젊은 아내의 뺨에 흐르던 그 눈물의 기억이 희미해져갔다. 악마가 다시 나를 찾아온 것이다.
16장. 두 번째 몰락
학원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학원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학생들이 빠져나갔다. 이차 확장한 학원의 교실이 점점 비어갔다.
밤마다 모이는 포커판의 스릴을 놓치기 싫었다. 집에는 또다시 거짓말을 했다. "학원 일이 많아서", "누구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동업자와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카드도박으로 얼마를 잃었는지 기억도, 계산도 되지 않는다. 통장 잔고는 날이 갈수록 줄어만 갔다. 어느 해 12월 31일, 새해를 앞두고 벌인 포커판에서 하룻밤에 천만 원을 잃고 새벽에 귀가해 아내와 크게 다퉜다.
17장. 강원랜드로의 마지막 여정
포커에 익숙해질 무렵 이번에는 '바둑이'라는 카드도박을 배웠다. 판돈은 더욱 커졌고, 아드레날린은 폭발했다. 기계에도 달려들었다. 하룻밤에 600만 원을 잃기도 했다.
누군가 강원랜드를 추천했다. "그 돈이면 거기 가서 한번 해보세요. 잘하면 대박 날 수도 있을 텐데." 처음에는 강원도까지 가는 게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결국...
학원 경영권을 동업자에게 넘기고 받은 지분금의 일부는 아내에게 송금했다. 나머지를 들고 여행을 떠났다. 또 한 번의 도피 여행. 이번에도 돌아올 계획은 없었다.
마지막 장. 늦은 깨달음
2024년 여름, 이제야 깨달았다. 너무 늦었지만, 돌이킬 수 없이 늦었지만, 이제는 고개를 숙여야 할 때가 왔다. 아니, 오히려 이제부터는 고개를 들어 저 푸른 하늘도 바라보며 살아야 할 때다.
도박은 인간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서운 것이었다. 그 마수의 털끝만 스쳐도 온몸과 정신이 감염되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치유할 수 없는 불치병이 된다. 치사율 100%의 병, 한번 걸리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
이제 나는 얼룩진 아내의 눈물자국을 닦아주고, 만신창이가 된 가족의 상처를 돌보며 살아가야 한다. 더 이상의 헛된 도전은 그만두고, 아직 나를 떠나지 않은 소중한 것들을 보듬으며...
이것이 한 도박 중독자의 마지막 고백이다.
60년을 살아오며 깨달은 진실.
도박은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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